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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그리고 함께 찾아온 광복의 기쁨.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습니다.

<녹취> 귀국선 노래 :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8.15 광복 직후 대략 140만명이 일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가족의 품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던 이 또한 부지기수였습니다.

<오프닝>

제 뒤에 보이는 바다가 바로 71년 전 귀국선이 오갔던 대한해협입니다.

8.15 광복이 되자 강제징용피해자들은 바로 저 대한해협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갔는데요.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끝끝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과연 그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던것일까요?

그 내막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교토에서 동해를 향해 자동차로 2시간.

일본의 대표적 군항 마이즈루 시가 나타납니다.

일승천기를 휘날리고 있는 해상자위대의 최신예 함정들도 눈에 띕니다.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솟은 고로다케산 전망대.

이곳에 오르면 군사도시 마이즈루의 또다른 면목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과 작은 섬들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절경! 바로 일본의 100대 비경으로 꼽히는 마이즈루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관동대지진 이후 가장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던 우키시마호 폭침 사고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8.15 광복 직후 조선인 징용 피해자를 태운 첫번째 귀국선 우키시마호.

1945년 8월 22일 일본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예정대로라면 3일 후 부산항에 도착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출항 이틀만인 8월 24일 마이즈루만에서 폭발과 함께 침몰합니다.

당시 목격자들은 그야말로 참혹한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녹취> 미시마 게이코(우키시마호 폭발 목격자/1996년 인터뷰) : "시체가 떠내려왔어요. 전부 만세하고 손을 올린 상태로 떠올랐었어요. 1시간 사이에 14구나 떠올랐어요. 밤낮없이 냄새가 심해서..."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촌 마을.

가와하타 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고기를 잡고, 그물을 수선하는 일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

그런 가와하타 씨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한국말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고"라는 통곡 소립니다.

<녹취> "모두들 아이고 아이고 했어요"

침몰한 배에서 사라진 가족을 찾는 통곡의 소리, 살려달라는 분노와 슬픔의 소리.

가와하타 씨는 당시 구조에 나섰던 마을 어른들을 통해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수십번 전해듣고 또 전해들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인터뷰> 가와하타 코지(마이즈루 어민) : "폭발해서 떠내려 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배 모서리를 붙잡고 '도와주세요'라고 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곳에서 약 3백미터 떨어진 해변가.

침몰 현장을 정면으로 바라볼 있는 곳에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한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카츠히코 요에 씨는 이 동상을 만들게 된 일을 계기로 일본 내에서 우키시마호 추모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인터뷰> 카츠히코 요에(우키시마호희생자 추모사업회장) : "일본의 전쟁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전해나갈 예정입니다."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8월 24일에는 매년 추모제도 열립니다.

올해로 39회째를 맞았습니다.

추모 행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절실했을 희생자들, 그 넋을 위로하는 마음이 곱디 고운 춤사위에 담기고.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꽃 한 송이에 담아 파도에 실어 떠나 보냅니다.

<인터뷰> 타마타 미키(국제고등학교 2학년) : "교과서로 배우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여기에 와서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참석자들은 가슴 아픈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으려 노력할 때 한일 양국간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터뷰> 카츠히코 요에 (우키시마호희생자 추모사업회장) : "일본이 메이지 시대 이후 조선반도를 식민화시키려고 한 그 사실을 저희들은 똑똑히 받아드려야만 합니다. 그 점을 묵인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우키시마호의 진실은 여전히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일본 정부가 밝힌 조선인 사망자는 모두 524명.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승선자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생존자들은 사망자 숫자에 의문을 표시합니다.

<녹취> 김동연(우키시마호 생존자/1996년 인터뷰) : "최소한 3,500에서 5,000명 죽었어요. 그건 뭐 그 당시에 공공연히 우리 산 사람이나 그 현지에서 떠돌아다니는 얘깁니다."

사고 원인을 놓고도 말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의한 사고라는 입장.

그러면서 사고 9년 후인 1954년 선체를 인양해 고철로 팔아버렸습니다.

사고 원인을 규명할 유일한 증거가 사라진 겁니다.

반면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일본의 '계획된 폭침'이라고 주장합니다.

<인터뷰> 전재진(우키시마호폭침사건진상 규명회 회장) : "감응 기뢰가 폭발하는 기전이 전혀 발생할 수 없는 상태이면서 폭발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기뢰가 폭발할 때 생겨나는 현상인 물기둥이 없었다는 거죠."

지난 2005년부터 5년 동안 조사에 나섰던 한국 정부도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끝내 사건 실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4년 전 유족회가 침몰 현장 유해 발굴 조사를 실시했지만 바닥이 두꺼운 진흙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한영용(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대표) : "지금 유품이나 유골을 고국을 얼마나 오고 싶겠습니까? 그 선조들 어른들이 영혼이라도 모셔와서 고국에서 고국 산천에서 지낼 수 있도록 조치를 해줘야되는게 자식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사건의 실체를 증언하고 알려줄 우키시마호 생존자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한때 수십 명에 달했지만 이제 남은 생존자는 단 두 명.

<인터뷰> 이철우(우키시마호 생존자/92세) : "배가 막 두 번.. 빵빵 (?) 그래서 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파편 맞아서 쓰러지고 막 이제 이렇게 한번 기울고 이렇게 기울더니 그냥 텀벙 가운데가 뚝 끊어져버려. 가운데가 끊어져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이 할아버지에게 우키시마호 사건은 아직도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는 앙금이자 마음의 빚입니다.

<인터뷰> 이철우(우키시마호 생존자/92세) : "그 배에서 죽은 사람들 사체라도 찾아서 고향에 와서 묻히게 해줬으면 좋겠어"

일본 큐슈의 대표적 항구 도시 후쿠오카.

후쿠오카에서 쾌속선을 타고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가면, 부산과 일본을 잇는 최단 항로에 위치한 이끼섬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구 3만8천 명에 불과하지만 섬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섬입니다.

대한 해협이 한눈에 내려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이끼섬의 고찰 천덕사.

불공을 마친 스님이 사찰 안쪽에 고이 모신 위패를 보여줍니다.

나무로 만든 낡은 위패에는 '대한민국 조난자 정령등'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광복이 되자 부푼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가던 강제 징용 피해자들.

제대로 된 귀국선을 타기 힘들어 어선이나 작은 목선을 이용해 바다를 건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강풍과 파도를 만나 조난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귀국선의 주요 항로였던 이곳 이끼섬에는 수시로 시신들이 떠내려왔다고 합니다.

<인터뷰> 니시타니(천덕사 주지스님) : "아직 여기 아시베항구에 모래사장이 많이 있었을 때, 줄줄이 시신들이 늘어져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의 시신이 특히 많이 떠내려왔다는 해수욕장을 찾아가봤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돼 현재는 이끼섬에서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 중의 하나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은 여전히 참혹했던 사고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와타이시(이끼섬 주민) :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하나둘 돌아가려고 하는데 폭풍우를 만나서 나가던 길에 난파당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배에서 떠내려 온 시신들이 해변가에 가득했고, 수습하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고도 증언합니다.

<인터뷰> 와타이시(이끼섬 주민) : "한국 사람들의 시신이 떠내려 온 걸 동네 주민이 해변 모래밭에 놓고 거적을 덮어놓았던 게 바람에 젖혀져 다리가 보여서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고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말씀하셨어요."

백사장을 건너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자, 나즈막한 언덕 위에 비석 하나가 외로이 서 있습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쓸쓸히 숨져간 징용 피해자들.

그 넋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비입니다.

71년전 바로 이 앞바다를 지나가다 희생됐던 대한민국강제징용피해자를 위로하기해 세워진 비입니다. 이 비가 세워진 방향도 의미가 있는데, 희생된 분들의 넋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보이는 방향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귀국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 징용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전혀 없어 짐작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나마 기록이 남아 있는 대표적 사건이 바로 미쓰비시중공업 징용자 사건.

일본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강제 징용에 시달렸던 조선인 246명이 9월 17일 귀국을 위해 목선에 오릅니다.

예정대로라면 하루 뒤 부산에 도착해야하지만 출발 몇 시간만에 거센 태풍을 만나 목선은 침몰하고, 결국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246명 모두 숨지고 말았습니다.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기에 그대로 묻힐 뻔한 사건은 당시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발굴 과정에서 200여 구 가까운 시신을 수습했지만 나머지는 행방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올해 75살의 권오복 씨는 바로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고 미쓰비시중공업으로 징용갔던 아버지.

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 온 편지에는 당시의 고단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귀국한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권오복(미쓰비시중공업 한국인 침몰유족회장) : "내가 3살 때 아버지가 가셨거든요? 그러니까 따지면 얼굴도 모르는거지..내동생은 100일 지나고선 그 이튿날 갔으니까,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해서는 얼굴도 모르고 그러니까..."

함께 희생됐던 유가족들과 함께 미쓰비시 중공업의 사과와 진상 조사를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신세철(미쓰비시중공업 한국인 침몰유족 부회장) : "미쓰비시에서 진짜 미안하다고 말을 해라....데려다 일을 시켜 먹었으면 한국 땅에다 데려다 놔야되거든요. 책임이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그 정도는 책임을 져야죠."

일본 정부 역시 묵묵부답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뷰> 정애영(일제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 전문위원) : "동원을 해왔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하는 부분인데, 시모노세키까지만 인솔해서 데려다주고 그냥 돌아가라..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했던 경우도 많이 보이고...자연재해보다는 인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 교토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30여km 떨어진 단바 지역, 한때 300여 개 망간 광산에서 강제 동원 노역이 자행됐던 곳이자 일본 내 유일한 강제징용 기념관이 있는 곳입니다.

<인터뷰> 이용식(단바 망간 기념관장) : "아버지가 40살부터 진폐증으로 고생하며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들에게 자기는 곧 죽을 것이지만 그 역사를 잊어선 안된다고...우리들의 역사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만든 박물관입니다."

<녹취> "하나 둘 셋"

하얀 천이 내려가자, 수줍은 듯하면서도 단단한 표정의 동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20대 전후 젊은 나이에 강제 징용에 끌려갔던 노동자들.

그 아픔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일제 강제 징용 노동자상입니다.

일본 내 강제징용 현장에 추모상이 세워진 건 처음입니다.

<인터뷰> 김서경(조선인 노동자상 조각가) : "과거를 많이 덮으려고 하고 왜곡시키려고 하는데 그런 과거들을 우리는 제대로 규명을 해야되고 그속에서 우리의 역사가 좀 많이 알려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서 이 작업을 했습니다."

자국의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하는 일본인들과 국내 노동단체들이 힘을 합쳐 추모상을 건립했습니다.

<인터뷰>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 : "이 비극의 현장을 저희들이 두고두고 후손들에 대한 역사의 교훈의 장으로도 삼고..."

<인터뷰> 박석민(민주노총 통일위원장) : "노동자들이 강제징용 노동자문제만큼은 앞장서서 좀 해결하자..."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의미있는 발걸음이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고 희생됐는지, 또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인터뷰> 정애영(일제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 전문위원) : "일본 정부라든지 차원에서 이것을 전쟁 책임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유골 문제라든지 유골 반환에 협조를 한다든지, 그리고 한국 정부도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아직 유해 발굴은 고사하고 정확한 피해 상황조차 파악이 되지 않고 있는 강제 징용 희생자들.

일제에 핍박받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광복 7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외면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